[인터뷰] 끊임없는 노력과 열정에 박수를, 유태영을 만나다.
[인터뷰] 끊임없는 노력과 열정에 박수를, 유태영을 만나다.
  • 황웅재 기자
  • 승인 2023.05.05 13: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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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호스트 유태영 / 제공 = 블랙스완스피치
쇼호스트 유태영 / 제공 = 블랙스완스피치

 

Q.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세 아이 엄마고요, 영어 강사를 26년 정도 했고요, 가톨릭 평화방송 아나운서, 텔레비전 리포터, 쇼호스트로 활동하고 있고요, 라디오 방송 DJ도 진행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 가서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영어로 라이브 커머스쇼를 진행하는 게 꿈입니다. 작년에 제가 세계 유교 문화 홍보대사로서, 각국의 이집트, 그리스 대사관 들을 돌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와 전통을 소개하고, 그쪽의 문화를 배웠는데요, 외국에 진출하는 것보다는 한국의 Food, Culture, 한국의 Static 문화 Cosmetics 제품들(화장품 제품), 그리고 각 지역의 특산물을 전 세계적으로 알리고 팔리게끔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Q.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셨어요! 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하다.

 A. 제가 제 일생에서 큰딸로서 멘토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생각하고, 잘하고, 진로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도와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속된말로 맨땅에 헤딩하고 자란 케이스여서 저의 제자들이나 자녀들에게는 시행착오를 조금 덜 겪고, 좀 특별하지 않아도, 그 아이들을 특별하게 만드는 일을 하는 데에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그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미국에서 배운 선진문화 교육 시스템을 한국, 비록 제가 운영한 게 영어 유치원이었지만(웃음) 그런데 학생이 550명 정도 되었거든요, 전국 1등이었어요. 직원이 55명? 저는 항상 하면 TOP을 해요(웃음). 처음엔 다 비웃었죠. ‘네가 무슨 1등이야 시골에서’ 그런데 제가 1등을 했고, 전국에 있는 영어학원 원장들이 견학을 올 정도로, 앞구정에서 학원을 바꾸자고 할 정도로 유명한 학원을 운영했습니다. 14년 동안 전국 1등을 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대기업인 웅진에다 팔고 나왔어요. 규모가 너무 커지다 보니 살 수 있는 개인이 없더라고요. 10억 이상을 주고 개인이 사기는 어렵잖아요. 그래서 대기업에 판매하고 매각하고 나오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얻은 자부심이나, 제 직업에 대한 그런 것들이 있고요. 제 제자들이 존스홉킨스 의대나, 생명공학과, 서울대학교도 세명을 보냈거든요. 그리고 코넬 대학교. 전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어서 너무 기쁘고요, 지금 전남대 의대 다니고 있는 저의 제자들이 ‘원장님 덕분에 영어가 너무 쉽고 재밌고, 쉽게 가르쳐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라는 응원을 보내줘요. 그 말을 의대 본과 마지막 학년인데도 문자를 보내주고 있어요. 그러면 진짜 행복하더라고요. 그만큼 제가 아이들에게 사랑을 많이 베풀었고 인재를 키우는 데 보람도 있었던 것 같아요.

 

Q. 본인을 상담가라고 소개했는데 상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A. 책임감이 크고 항상 그렇잖아요? 건물은 다시 지을 수 있지만, 아이들의 시간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사명감이 필요하고,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Q. 본인만의 노하우가 있는지?

 A. 저는 상담을 할 때 피상담자가 원하는 목표를 먼저 파악하고, 기질, 성격, 사실 살짝 관상도 보고 있어요(웃음). 보면서, 이분 조금 소심하구나, 대범하구나, 꿈이 크구나 하는 것들을 간파하면서, 그분의 기질에 맞게 상담을 해줘요. 그래서 학생들이 공부할 때에도 키워드를 찾는 걸 하잖아요? 보통 키워드만 찾는 게 아니라 거기에 맞는 성격을 분석을 해줘요. 예를 들어 어떤 아이는 문장을 키워드로 찾아요. 그러면 그런 친구들은 정이 많고, 우유부단하고. 이런 키포인트를 찾아서 너는 이런 점을 고치면 돼. 라고 말해주거든요. 공부할 때 조금 냉정하게 생각해. 이렇게요. 그냥 상담하는 게 아니라, 나이가 좀 있고, 수천명의 학생을 가르쳤기 때문에 노하우가 생겼잖아요. 그러니까 단순히 학습법이 아니라, 그 사람의 환경, 기질, 성격 이런 것들을 보면서 거기에 맞춰 눈높이에 맞게 상담을 해줍니다. 대신, 어머님들이 많이 배우시고, 깐깐한 어머님일수록 더 좋아요. 왜냐면 전문적이기 때문에, 그분들에게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데이터를 제공하고, 그분들에게 맞는 상담을 해드릴 수 있으니까, 굉장히 즐겁습니다. 20대 때부터 아이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수천명의 엄마와 학생들을 만나잖아요? 그러면 그 친구들의 환경이나, 유전자나, 공부하는 습관이나, 동기유발 이런 것들이, 네 가지가 어우러져야 공부를 잘하게 되고 학습이 향상되잖아요? 그래서 그런 부분들을 제가 간파하고, 연륜이 생기다 보니 통찰력도 생기고. 거기에 맞게 상담을 유연하게 해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을 라이브 커머스나, 고객, 청취자분들과 소통할 때 유연해지고, 겁도 덜 나는 것 같습니다.

 

Q. 상담 중 기억에 남는 상담 내용이 있을까요?

 A. 음… 기억에 남는 상담이요… 많이 있는데, 저는 일단 학생들을 만나면 학생들의 편이 되어줘요. 엄마나 아빠 편이 아니라, 아이들을 먼저 다독거리고 힘들었겠다. 해주고요. 그렇게 해서 아이들이 마음을 열고 편안하게 말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요. 엄마나 아빠를 만났을 때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엄마, 아빠가 ‘저희 애가 너무 소심합니다. 또는 이러이러해서 성질나 죽겠습니다, 열 받아요.’ 이렇게 말씀하시면 가만히 생각해보라고 되물어요. 혹시 어머님 아버님 조상님 중에 소심한 성격이 있지 않으신가요? 하고 되묻거든요. 그러면 부모님들이 ‘아! 저희 남편이, 저희 아내가 소심하다.’ 이렇게 고백하세요. 그러면 그 기질을 받아들이시라고 말씀드리고요. 그렇게 하는데, 제가 이제 사춘기에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제시를 잘 하는 편이거든요. 저는 아이들에게 구체적으로 아이들에게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독해를 왜 해야 하는지, 공부하는 것은, 우리의 조상들이 수천년 동안 맞으면서, 죽어가면서 얻어낸 평등권이다. 이 중요한 권리를 우리가 활용해야 하지 않겠냐. 그리고 우리가 공부하지 않으면, 돈이 많지 않은 한, 신분 상승하기가 굉장히 힘들다. 이런 식으로 구체적으로 아이들에게 말을 해주는데요, 사춘기 자녀를 둔 어머님들이 많이 오세요. 자녀들과 힘들었던 점, 갈등이 있었던 점 등을 울면서 상담을 하세요. 그중 제일 힘들었던 아이들이 부모님이 이혼 한 케이스였거든요. 그런 경우는 아이들이 공부도 하기 싫고 의욕도 없어요. 집안이 붕괴 된 거니까. 그런 경우는 아이들에게 충분히 공감을 해주고, 구체적인 길을 제시해줬어요. 그런 아이들에게 뭔가를 제시해주는 게 힘들었고, 그 친구들은 대개 집안 형편도 좋지 않거든요. 그런 아이들에게 사주고, 먹여주고 용기를 복 돋아 주면서 비뚤어지지 않게 도와줘야 했어요. 아주 부유한 집이나, 환경이 갖춰진 아이들은 제가 가르치기만 잘 하면 되잖아요. 그런건 문제가 되지 않는데요, 부모님이 이혼하셨고, 집에 들어가기도 싫고, 공부도 하기 싫고. 이런 아이들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 친구들에게 기프티콘도 쏴주고(웃음) 용기 내라고 말해주고, 어머니에게도 커피 쿠폰을 거꾸로 쏴주고(웃음). 그분들이 절망의 상태에 있을 때 도와주고. 그 친구 중 한 명이 9등급으로 왔는데, 3등급으로 이번에 간호대에 보냈거든요. 이런 경험이 굉장히 자랑스럽습니다. 한 명은 성악을 시켜서 1년 반 만에 9등급에서 4등급으로 올리고, 전남대학교 성악과 장학생으로 보냈어요. 진로가 아예 없었던 아이였는데, 성악을 시작함으로써 자신감이 생기고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어머님이 커피, 케이크와 상품권을 사 와서 감사 인사를 해주셨어요.

 

Q. 상담하면서 바뀐 ‘나’

 A. 일단 상담을 하면서 제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분들에 대한 상황이나 공감, 동감 이런 능력들이나 환경에 대해서 한 번 생각 해보는 게 좋았던 것 같아요. 제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을 의뢰받은 적이 있었거든요. 예를 들어서 6학년 남학생 엄마가 오셔서 우시는 거예요. 왜 우시냐면 초등학교 여자 선생님이 아이를 성추행 한 거예요. 저는 너무 깜짝 놀랐거든요. 학교 교사가 그렇게 한 거예요. 그 엄마가 그 여자 선생님을 죽여버리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렇잖아요. 자기 소중한 아이가, 6학년밖에 안 되었고. 그 아이가 아무것도 평가하고, 판단할 수 없는 연령이잖아요. 그 말을 듣고 너무 무섭고, 겪어보지 못한 일인데 내가 이 엄마를 위로해줄까. 하면서 또 다른 면들이나, 제가 안 겪어본 일들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고, 자료를 찾아보고,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떻게 이분들을 도와줘야 할까. 인간적으로 성숙하게 되는 것 같아요.

 

Q. 미국 시카고로 이민 가셨었는데, 왜 이민 갔는지 궁금합니다.

 A. 고모가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하고 계시거든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분이시고, 지금 거기에서 신경외과 의사를 하고 계시고요, 막내 고모는 한의사를 하고 계시는데, 아빠 형제분 다섯 분이 다 미국에 계셔서 저희 집안은 당연히 가야 하는 줄 알고 어렸을 때 그냥 따라갔고요. 아빠가 공무원이셨는데, 승진하고 하면 청탁을 해야 하고, 돈을 줘야 승진을 시켜주고 하는 문화가 싫으셨나봐요. 그래서 이민을 갔는데, 실패였어요. 너무 가난한 이민자가 가서, 영어도 못 하는 이민자가 가서 너무 고생해서 제가 철이 없었는데, 미국에 가서 철이 들었습니다. 중1 때 갔어요. CAN도 모르고 갔어요. CAN도 모르고 미국 학교에 갔는데, 너무 좋은데 대화도 안 되고 수업도 알아먹기 힘들고, 그때는 84년도여서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코스도 없었어요. 엄청 고생해서, 그곳에서 배웠던 것, 언어에 대한 충격, 언어에 대한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더 오랫동안 이곳에서 영어 교육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정직하고, 질서를 정말 잘 지키고요. 동방 예의지국인 한국보다 더 예의가 바르거든요. 우리나라는 가정에서의 예의는 깍듯하지만, PUBLIC에 대한 예의는 엉망이었던 나라였고, 미국은 Public예의는 깍듯하고, 가정에서는 자유로운 상태였는데, 선진 문물도 배울 수 있었고, 그분들의 교육에 대한 태도나 환경이 제게는 너무 센세이션 했죠. 저한테는. 너무나 획기적이었고, 공립학교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시설이 너무 좋았거든요. 그리고 가르치는 시스템도 완전히 달랐어요. 수학도 쓸 데 없는 것을 가르치지 않아요. 필요한 것만 가르치고 숙제도 퍼즐이나 미로찾기 이런게 숙제예요. 아이들이 수학을 좋아하게끔 만드는 거죠. 미술 시간에도 오늘은 데생 한다. 하면 소재도 똑같잖아요. 거기는 미술 시간에 모든 아이들 에게 다른 소재를 줘요. 콩테도 주고, 수성 사인펜 등 자기가 소재를 정해요. 마음대로 그려라. 마음대로 망치든지 말든지(웃음). 그래서 아이들의 창의력이 뛰어난 거죠. 그런 점은 엄청 배울만 한 것 같아요. 토론하는 문화,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존중해주는 문화, 이런 것들은 정말 배울만 하고요. 이런 것들이 좋았던 것 같아요.

 

Q. 미국에서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A. 미국에서 제가 학교가 바뀌고, 영어도 못 하니까 스트레스가 극심했거든요. 그래서 입 주변에 피부병처럼 생겼었는데, 어제까지 정말 친절했던 제 짝궁 들이 식판을 들고 다 도망가는거예요. ‘전염병이다, 쟤 좀 이상하다’ 하면서 손가락질 하면서. 영어도 못해서 전염병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때가 중 1이었거든요. 너무 서럽더라고요. 다 저를 멀리하고 따돌리고. 집에 가서 의사 고모한테 말해서 고모가 학교를 뒤집어 엎었거든요. 또 한 번은 내일 소풍을 가는데, 시카고 동물원을 가는 거예요. 시카고 동물원은 엄청 커서 2박 3일을 봐야 하거든요. 저는 거기에 너무 가고 싶었는데, 영어를 못한다고 저를 안 데려갔어요. 그래서 또 고모가 학교에 가서 뒤집어 엎었죠. 고모가 워낙 영어를 잘하시고 똑똑하니까. 그래서 그런 설움은 있어요. 안 보이게 인종 차별이나 설움이 좀 있었고요. 그다음에 또 그걸 이겨내는 게 제 한국인으로서 능력과 끈기였던 것 같아요. 영어를 못하면 이미 부과세 VAT가 붙은 물건인데 영어를 못하니까 VAT를 더 내라. 해서 물건을 살 때 속을 수 있었어요. 10%를 더 내게 되게끔. 그게 뭐냐 하고 물어보면 PLUS TAX. 이렇게 말하는거예요. 그런데 제가 영어를 못하면 당하는 거고, 뭔가를 알면 이미 여기 붙어있는데 이게 뭐냐. 이렇게 따질 수 있는 거죠. 그래서 그런 사기를 많이 당했었죠. 중1 때. 왜냐면 엄마가 영어를 못하시니까, 가서 털실을 사가지고 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가서 사가지고 오거나 하는데, 제일 재밌었던 한 번 있었어요(웃음). 간장을 사야 하는데 soybean sauce를 몰랐었어요. 그 당시에, 고숙이 미국 사람인데 콜라를 들고 하루 종일 월마트를 돌았었어요. 아무리 설명해도 잘 모르고(웃음). 그때는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고모에게 전화도 못 하고. 그래서 월마트를 하루 종일 돌고 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한 시간 운전해서 가면 japanese 가게에서 간장을 판다는 거예요. 그것도 일본식 간장을(웃음). 왜냐면 그때는 한국을 잘 몰랐거든요. 너구리라면 하나에 7달러였어요. 그 때 당시였으면 1달러가 700원이었는데, 3900원을 주고 라면을 먹어야 하는 거예요. 한 봉지를. 그랬었는데 지금은 가면 약과도 팔아요(웃음). 미국에 가면 박카스 공장도 있고요, 신라면 공장도 있어요. 그래서 지금은 쉽게 사 먹을 수 있어요(웃음).


 
Q. 웅진 플러스 28개 지점 확장?

 A. 제가 쇼호스트를 하게 된 계기가. 남을 설득을 잘하고, 감성 있는 호소를 잘 하는 것 같아요. 이 프로그램이나 상품이 좋으면 그 특, 장점을 어필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해서 쇼호스트에 도전하게 되었고요. 그런 점들이 작용해서 영업을 되게 잘하는 것 같아요. 저는 영어 전문가고, 저는 거의 밑바닥부터 영어를 다 해봤거든요. 학습지도 다 해봤고, 학습지 강사도 해봤고. 그래서 저를 신뢰하는 원장님들이 굉장히 많았었고요. 왜냐하면 교육의 노하우를 아니까. 그리고 프로그램이 좋았습니다. 그것을 제 이득이 아니라 진실 되게 말을 했고. 28개의 지점을 늘릴 수 있었던 것은 평상시에 쌓아두었던 신뢰와 노하우로 충분히 어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상담을 100명을 하면 99명이 등록을 해요. 나머지 한 명은 1년 후에 와서 등록하더라고요. 그 정도예요. 거의 적중률 100퍼센트. 그분이 이사를 가야 하거나, 외국을 나가야 한다거나 하지 않는 이상은 거의 다 등록을 하셔요. 그러면 그게 다 뭘까요? 노하우나 신뢰감이나 이런 것들이 있었겠죠. 왜냐면 케바케로 전부 다 말해줄 수 있으니까. 예를 들어 6학년인데 파닉스예요. 그러면 갑갑하죠. 엄마가 교육열이 없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엄마를 다그치면 안 되거든요. 자기도 형편이 안되서 늦게 보냈는데, 그러면 달래주면서 빨리빨리 요령껏 해야 하니까. 그런 게 생기긴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마 말을 좀 잘 하고, 제가 관종이고(웃음) 쇼업 하는 능력, 남을 설득하려는 마음이나 기술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Q. 상담사, 선생님, 리포터, 쇼호스트로 활동하고 계신 데, 이렇게 바쁜 행보를 보여주시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무언가에 도전할 수 있는 에너지나 원동은?

 A. 제 에너지의 원천은 제가 사실 가난을 저의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부모로서 무능력해서 아이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시하지 못하고, 아이들이 더 공부하고 더 노력 하고 싶고, 업그레이드 하고 싶은데 엄마 아빠가 능력이 되지 못해서 도와주지 못하면 그거는 저는 죄라고 생각하거든요. 왜냐면 제가 부모님한테 그런 케어를 못 받았기 때문이죠.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니까 최선을 다했고요. 제 기질이 미국에서 생고생을 했기 때문에 약간 독립적입니다. 의존적이기도 하지만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잖아요. 그걸 다 저 혼자 이겨내고 왔었거든요. 게다가 요즘에는 인생이 길기 때문에 40살이 되면 새로운 직업에 대해서 터닝포인트를 잡고 직업을 준비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강연이나 이런 것들을 많이 쫓아다녔고요. 그리고 여자로서 살다 보니까, 남편이나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나만의 먹고  살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야겠다 싶어서, 한 12년, 15년 전부터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고요. 한식 조리사, 식품 가공 기능사, 폐백도 무형문화재 선생님에게 전수 받고, 김치 축제에서 1등도 했거든요. 그래서 저희 친정 어머니는 우셨어요 ‘왜 네가 영어도 잘하고, 똑똑한데, 안 해도 되는데 이런 막일을 하냐.’ 왜 힘든 일을 하냐 이러시는데, 부모로서, 제 남편이 어떻게 될 수도 있잖아요. 아플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고. 그러면 저 혼자 잖아요 애가 셋인데.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서 항상 일을 했던 거예요. 먹고 살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놔야 하는데 영어는 할머니가 되면 누가 제게 영어를 배우러 오겠어요? 아니잖아요. 그래서 40살을 포인트로 잡고 그 때 새로운 기술을, 누구도 제 영역을 침범할 수 없게 개척을 해놓은 거예요. 그래서 부모로서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고, 거기에서 나이가 먹어서 영어교사로서, 방송인으로서 활동을 못 하게 되었을 때, 내가 이 바닥에서 무엇을 할 수 있지? 이 생각을 했던 거죠. 사람의 필수 생활 요소가 의식주잖아요? 그래서 일단 먹을 걸로 빨리 돈을 벌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그 기술을 배워 놓은거죠. 저는 모성애가 깊어요. 원동력은 모성애입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서, 남편이 없거나, 쓰러졌거나. 요즘은 세대가 바뀌어서 남편 혼자 돈 버는 시대가 아니에요. 내가 신데렐라가 아니고서는 같이 돈을 벌어야 하고, 같이 일을 해야하는 세대잖아요. 그런데 남편 등골만 빼먹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주체적으로 뭔가를 하고 싶은데, 남편은 자기 개발을 잘 안 합니다(웃음). 그러니까 저라도 해야죠. 그래서 무언가를 배워야 하는 거예요. 또 그런 것을 좋아하고(웃음).

 

Q.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A. 올해는 다시 살을 빼고 싶고요, 쇼호스트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습니다. 딕션도 많이 연습해야 하고, 표정이나 핸들링도 많이 연습해야 하지만, 최고의 쇼호스트로서 청취자들과 만나고 싶고요. 중년 여성들에게 아줌마들도 할 수 있다, 우리 들도 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고요. 당연히 돈을 잘 벌고 싶습니다(웃음). 목표는 최고의 쇼호스트!(웃음)

 

Q. 도움과 응원을 아껴주지 않은 가족, 지인, 팬분들에게 한 마디

 A. 저라는 존재를 사랑해주고,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주고, 저의 단점도 다 커버해주는 우리 가족들과, 지인 들게 정말 감사하고요. 저도 때로는 쳐지고, 안하고싶고, 그냥 숨고싶고 이럴 때도 있지만, 또다시 나서고 힘내게 하는 게 가족인 것 같습니다. 가족 여러분, 제 주변에 있는 친구 여러분 모두 감사하고 저도 열심히 반짝반짝 살아서(웃음) 보답하고 싶고요. 오히려 제 가족은 제가 쉬기를 바라거든요. 너무 에너지를 소모하니까(웃음). 그러니까 때때로 저의 워라벨을 지키면서 제 삶을 찾는 그런 현명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공 = 블랙스완스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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