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사직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 한화 이글스의 경기 시작 전, 특별한 이벤트가 열렸다. 롯데 자이언츠의 레전드이자 지금의 한국야구를 있게 해준 원년 슈퍼스타, ‘무쇠팔’ 최동원의 13주기 추모 행사가 진행되었다. 추모식에는 최동원 야구단 어린이 선수들이 참여하였고, 생전에 인연이 있던 한화 이글스의 류현진이 최동원의 동상 앞에 헌화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최동원은 당시 일본 프로야구의 직구 평균 구속이 130km대 중반 정도였던 시절, 150km에 다다르는 강속구와 낙폭이 매우 큰 일명 ‘폭포수 커브’를 주 무기로 가졌던 선수다. KBO 출범 이전인 1970년대부터 고교 야구와 대학 야구에서 눈부신 활약으로 스타의 반열에 올랐고 국가대표로도 선발되었다. 198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 이후로 8시즌 동안 1414⅔이닝 103승 74패 26세이브 평균자책점 2.46 탈삼진 1019개의 기록을 남겼다.
언뜻 보면, 선동열, 박찬호 등 과거에 활약한 다른 선수보다 경력이 짧고 해외 경력은 없는 점과 객관적인 데이터만을 보면 ‘레전드‘라는 칭호가 붙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최동원의 등번호인 11번은 은퇴 이후 롯데 자이언츠의 영구 결번으로 남겨졌고 시즌 최고의 투수들에게 주는 ‘최동원상’이 만들어졌으며, 세상을 떠난 지 13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히 야구팬들에게 기억되며 매년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최동원이 한국야구의 전설이라 불리는 이유는 오직 성적만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지금의 한국야구를 만들었던 최동원의 발자취를 따라, 그때 그 시절로 잠시 돌아가보자.
▶1984년 가을의 전설 최동원, 영원히 깨지지 않을 대기록
초기 한국야구에는 지금과 같은 투수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았다. 1선발부터 5선발까지 로테이션 불펜의 세부 분업 없이 에이스 투수는 어떤 상황이든 승리를 위해 등판했다. 당시 리그에서 최고의 성적을 내던 최동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198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 이후, 5시즌 동안 선발과 구원을 옮겨가며 매년 200이닝을 넘게 던졌다.
그중 단기간에 가장 엄청난 투구를 보여준 것이 바로 1984년 삼성 라이온즈와의 한국시리즈였다. 당시 한국시리즈는 전반기 1위 팀과 후반기 1위 팀이 한국시리즈에서 맞붙는 형태였다. 전반기 1위는 삼성이 후반기 1위는 롯데가 차지였으나 당시에는 최동원 이외에는 크게 돋보이는 선수가 없어 대부분이 삼성의 우승을 예측했다.
롯데는 삼성을 이기기 위해 최동원을 앞세우기로 한다. 당시 감독이었던 강병철은 1, 3, 5, 7차전에 등판하도록 지시하였다. 그 결과 첫 번째 경기는 삼성의 에이스 김시진과의 맞대결에서 9이닝 7삼진 완봉승으로 한국시리즈 최초 완봉승을 기록하며 승리했다. 이후 3차전에서도 9이닝 2실점의 완투승을 기록했지만 2차전과 4차전에 패배하여 2승 2패로 5차전을 준비하였다.
5차전에는 8이닝 3실점으로 호투했으나 득점 지원이 따르지 못하여 결국 완투패를 기록하고 만다. 최동원을 투입하고도 진 롯데는 더 이상 방법이 없는 듯했다. 하지만 6차전에서 호투하고 있던 임호균이 4이닝을 버틴 후 부상으로 내려갔고, 최동원이 등판하여 5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승리하였다. 마지막 7차전엔 무려 3만 5천 명의 관객이 모였다. 많은 이들의 관심이 몰린 가운데 최동원의 호투는 멈추지 않았다. 8회말 롯데 유두열의 결승 3점 홈런과 최동원의 9이닝 4실점의 완투승으로 1984년 우승의 영광은 롯데 자이언츠가 차지했다.
최동원은 10일 중 5일을 등판하면서 40이닝 동안 610구를 던졌다. 시리즈의 모든 승리를 한 선수가 기록한 것은 메이저리그조차 없는 기록이며 현재까지도 경신되지 않은, 앞으로 경신되지 않을 것이라 평가받는 기록이다. 선수의 기량 문제뿐 아니라 현대 야구에서는 선수 관리 차원에서도 크게 논란이 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6차전이 끝난 후 무리한 연투가 아니었냐는 인터뷰 질문에 최동원은 “무리였다. 그렇지만 팀이 이길 수 있다면 최대한 힘이 닿는 만큼 열심히 해서 이기고 싶다”라며 팀의 승리를 우선시했다. 현대 야구에서도 1984년 한국시리즈의 기록은 여전히 회자되는 불멸의 기록이다.
▶스스로 빛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던 그의 선택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빛났던 최동원의 희생정신은 경기장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최동원은1988년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던 2군 선수들의 권리를 위한 희생이었다. 연봉 하한선, 연금 제도 등 2군 선수들의 최소 생계를 위한 장치를 마련하려 했었다.
최동원은 이후 1995년 한 인터뷰에서 “더그아웃과 2군에서 활동하는 선수들 덕분에 내가 있을 수 있었고 내 이름 석자를 얻었다.”, “내가 아닌 우리라는 생각에서 시작했던 것이다”라며 선수협회의 의미에 대해 언급했다.
하지만 구단들은 선수들의 노조 결성을 원하지 않았고, 협회와 관련된 선수와는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며 엄포를 놓는 등 갈등은 깊어져 갔다. 결국 그해 11월 22일, 한국야구의 팬들을 놀라게 한 트레이드 소식으로 이어졌다. 팀 분위기 쇄신을 명분 삼아 롯데의 최동원, 오명록, 김성현과 삼성 김시진, 전용권, 오대석, 허규옥을 바꾸는 3대4 트레이드를 단행하였다.
삼성으로 옮겨 선수 생명을 이어 갔지만 최동원의 어깨는 더 이상 이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구속은 120㎞대로 매우 낮아졌으며 주 무기였던 폭포수 커브는 각을 잃어버렸다. 1989년엔 8경기 1승 2패에 그쳤고, 1990년 6승 5패 1세이브를 추가했다. 그렇게 최동원은 글러브를 내려놓으며 짧고 굵었던 8년간의 프로 생활의 막을 내렸다.
▶하늘의 별이 된 원년의 슈퍼스타, 최동원
야구 선수로써의 삶은 끝난 최동원이지만 이후에도 한국야구의 발전을 위해 다방면에서 노력했다. 1991년 지방선거에서 부산직할시(현 부산광역시) 서구 광역의원 선거에 출마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후에는 2000년 부산MBC 해설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2001년 한화 이글스의 투수 코치로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오기도 했다.
이후 2006년 다시 한화의 투수 코치로 부임하였을 때 신인이었던 류현진의 성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스프링캠프부터 류현진의 가능성을 보고, 반드시 선발로 기용할 것을 강력히 추천했다. 그의 안목은 정확했고 류현진은 지금의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투수로 성장했다. 그러나 최동원은 한화 2군 감독으로 있던 2007년부터 대장암 발병으로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2008년 이후 프로 지도자 생활을 끝냈으며 아마추어 야구단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다 2011년 9월 14일 향년 53세로 하늘의 별이 되었다.
최동원은 생전 공식 석상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별은 하늘에만 떠 있는다고 별이 아니에요. 누군가에게 길을 밝혀주고, 꿈이 돼줘야 그게 진짜 별이에요.”라는 말을 남겼다. 자신만 빛나기보다 남들과 함께 빛나기를 원했던 위대한 선수, ‘무쇠팔’ 최동원은 지금까지 야구팬들의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