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의 독립운동가 유동하 선생
2008년 10월의 독립운동가 유동하 선생
  • 김민정 기자
  • 승인 2008.10.01 15: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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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예스포츠신문) 김민정 기자 = 독립기념관(관장 김주현)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유동하 선생을 2008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그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다음과 같이 개최한다.

유동하 선생은 1892년 1월 5일 함경북도 원산 길명에서 부친 유경집과 모친 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부친 유경집은 1897년 홀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가 약재상을 운영하면서 간도, 연해주 등지의 애국지사들에게 군자금을 지원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항일운동을 도왔다. 1902년경 유동하 선생의 가족은 부친을 따라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지대 부근 한인마을로 이주하였다.

선생은 16살 때 허희명의 딸과 결혼하고 부친을 도와 약재상에서 일했다. 1909년 10월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을 위해 중국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러시아, 만주 일대의 한인사회는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에 안중근 의사는 공립협회의 회원인 우덕순, 조도선, 유경집·유동하 부자 등과 함께 '7인 동맹'을 조직하고 의거를 계획하였다.

러시아어에 능통한 유동하 선생은 안중근 의사, 우덕순 선생과 하얼빈까지 동행하고 연락을 담당하는 임무를 맡았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7시경에 안중근 의사와 선생은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안의사는 일경의 감시망을 피해 이토 히로부미를 환영하는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9시 30분경 세 발의 총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졌다.

의거에 성공한 안중근 의사는 조선만세를 뜻하는“코레아 우라”를 크게 외쳤고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유동하 선생도 뛰쳐나와“조선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일본 경찰은 선생을 안중근 의사와 함께 현장에서 피체하였다.

뤼순旅順 감옥으로 압송된 후 선생은 일제의 모진 고문과 협박에도 당당히 맞서며 국권수호의 뜻을 잃지 않았다. 결국 선생은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받았다. 뤼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후, 시베리아로 돌아온 유동하 선생은 한인동포사회에 애국정신을 전파하려고 노력하였다.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항일운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던 선생은 조선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받고자 많은 애국청년들과 볼세비키 혁명군에 가담했다.

하지만 유동하 선생은 1918년 시베리아에 주둔한 일본군에 의해 피체되어 싸말리아 강가 부근에서 총살당함으로써 27살에 먼 이국땅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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